Design Study

[펌글]디자인, 영화를 만나다

jisunlee 2011. 11. 8. 00:21
디자인, 영화를 만나다
[매거진 esc]
‘싱글맨’ ‘헬베티카’ 등 디자이너 출신이 감독을 맡거나 디자이너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들


한겨레



» 게리 허스트윗 감독의 〈헬베티카〉(2007).



서랍장에 가지런히 접어놓은 양말과 새것이나 다름없는 흰색 셔츠를 꺼내고 의자 위에 잘빠진 검은색 구두를 올려놓고 구둣솔로 닦는다. 거울 앞에서 폭이 좁은 짙은 갈색 타이를 매고 넥타이핀을 고정하는 이 남자. 이 남자는 지난주 국내에서 개봉한 영화 <싱글맨>의 주인공 조지(콜린 퍼스)다. 교수인 조지가 출근을 준비하는 장면에 오랫동안 눈이 가는 이유는, 이 영화의 감독이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톰 포드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동성애자인 교수 조지가 오랜 시간을 함께한 애인을 차 사고로 잃고 감정의 혼란에 빠진다는 내용이지만, 이 영화의 감독이 톰 포드라는 걸 알고 극장에 들어간 이상 영화 속 인물들이 입고 나오는 옷과 주인공의 집, 소품 등에 시선이 고정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영화 중반부. 조지가 자살을 결심하고 장례식장에서 입혀질 검은색 양복에 흰색 셔츠, 검은색 타이, ‘넥타이는 윈저 방식으로 매어주길’이라고 쓴 노트, 열쇠, 지갑, 서류 등을 책상 위에 올려놓은 장면에서는 ‘역시 톰 포드!’라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이 영화가 영화 자체를 두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구치’와 ‘이브생로랑’(YSL)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고 지금은 자신의 브랜드 ‘톰 포드’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올려놓은 디자이너 톰 포드가 만들어낸 세상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헬베티카’ 서체 만든 디자이너 다룬 영화가 그 시초

주로 영화의 시각적인 부분 일부만을 담당해왔던 패션 디자이너나 시각 디자이너가 영화의 중심부로 바짝 다가섰다. 최근 3년 동안 미국과 유럽의 디자인계에서는 디자이너가 메가폰을 잡고, 디자이너에 관한 영화를 찍고, 디자인 자체에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영화가 중요한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이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시작에 한 편의 영화가 있다. 뉴욕과 런던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독립영화 감독 게리 허스트윗이 만든 장편영화 <헬베티카>다.



» 미국의 그래픽 디자이너 밀턴 글레이저의 삶을 다룬 〈밀턴 글레이저: 투 인폼 & 딜라이트〉(2009).





» 미국의 건축사진가 줄리어스 슐먼에 관한 다큐멘터리 〈비주얼 어쿠스틱스〉(2008).





» 패션 디자이너 톰 포드의 감독 데뷔작 〈싱글맨〉(2009).



1957년 스위스의 디자이너 막스 미딩거와 에두아르트 호프만이 만들어낸 서체 ‘헬베티카’는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가장 현대적이고 대중적인 로마자 서체로 쓰여졌다. 이 영화는 길가의 간판과 지나가는 청년의 티셔츠, 각종 표지판, 안내문에 인쇄된 헬베티카 서체를 보여주고 수많은 그래픽 디자이너를 인터뷰하며 헬베티카 서체에 대한 다양한 얘기를 카메라에 담았다. 헬베티카가 50주년을 맞았던 2007년 개봉한 이 영화는 서체를 다룬 디자인 영화였는데도 웬만한 대중 영화 못지않은 관심을 받았다. 디자인 관련 영화가 거의 없기도 했지만, 만들어졌다고 해도 디자이너들끼리 돌려보는 데 그쳤던 이전의 디자인 영화와는 제법 달랐다. 디자인 뉴스 사이트 ‘디자인플럭스’의 이재희 에디터는 “디자인에 관한 장편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되고 상업적인 성공도 거뒀다는 게 전례 없는 일이었다”며 “디자이너뿐 아니라 디자인을 사용하는 이들의 관점이 영화에 담겨 있어 그만큼의 호응을 얻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헬베티카> 이후 디자인 영화는 비로소 좁은 디자인업계에서 벗어나 좀더 넓은 세상으로 나왔다.


‘아트 & 카피’ ‘타이프페이스’ 등 디자인 다큐도 줄이어

무엇보다 20세기를 이끌어온 유명 디자이너의 삶을 기록하는 형식의 다큐멘터리 제작이 활발해진 것이 눈에 띈다. 2008년에 제작된 <비주얼 어쿠스틱스>는 1930년대부터 대표적인 현대 건축가들과 함께 작업해온 미국의 건축 사진가 줄리어스 슐먼의 삶을 들여다본 다큐멘터리다. 이 영화의 포스터에는 1960년에 미국 건축가 피어 쾨니그의 건축물을 찍은 그의 가장 대표적인 사진 ‘케이스 스터디 하우스 #22’가 실려 있다. 네덜란드 건축가 렘 콜하스에 관한 인물 다큐멘터리인 <렘 콜하스: 어 카인드 오브 아키텍트>와 렘 콜하스가 1998년에 지은 프랑스 보르도의 집 안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그 집의 도우미 아주머니의 일상을 따라가며 건축물의 생명력을 얘기하는 <콜하스 하우스라이프>도 2008년에 개봉했다. ‘I♥NY’를 디자인한 미국의 대표적인 그래픽 디자이너 밀턴 글레이저에 관한 다큐멘터리 <밀턴 글레이저: 투 인폼 & 딜라이트>는 2009년 극장에 걸렸다.



» 영화 〈싱글맨〉의 한 장면.





» 영화 〈오브젝티파이드〉의 로고.



특정 디자인의 주요한 이슈를 인터뷰 등의 형식으로 심층 취재해 제작한 영화들도 많아졌다. <헬베티카>의 성공으로 다음 작품을 제작할 수 있게 된 게리 허스트윗 감독은 2009년 제품 디자인에 관한 다큐멘터리 <오브젝티파이드>를 내놓았다. 이 영화는 <헬베티카>만큼의 파급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제품 디자인을 폭넓은 시선으로 둘러볼 수 있게 했다. 지난해 개봉한 <아트 & 카피> 역시 흥미로운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다. 이 영화는 나이키의 ‘저스트 두 잇’(Just Do It)이나 애플의 ‘싱크 디퍼런트’(Think Different) 등의 광고 캠페인 담당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미국의 광고 시장을 파고들며 광고 문구와 이미지 등을 영상으로 기록했다. 올해 개봉한 <타이프페이스>는 미국 위스콘신의 오래된 인쇄공장 ‘해밀턴’을 촬영하면서 활자와 인쇄의 과거와 현재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스스로를 ‘디자인 애호가’이자 ‘디자인 영화 애호가’라고 설명하는 그래픽 디자이너 박경식씨는 이렇게 디자인 영화가 쏟아지는 현상에 대해 “디자인 자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진 것도 하나의 이유이고 디자인에 관한 심층적인 이야기를 담기에 영화는 접근도 쉽고 제작도 편리한 매체인 것도 이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가 디자인처럼 시각매체이고, 디자이너는 이야기를 시각적인 언어로 풀어내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디자이너가 영화 제작의 영역으로 들어가기에 더 쉬울 거예요. 또 그만큼 디자이너에게 영화는 매력적인 매체가 될 수 있죠. 한가지 걸림돌이라면 시각디자인의 경우 정적인 성격을 갖고 있어서 움직이는 영화 속에 들어갈 경우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최근 나오는 디자인 영화는 눈으로 즐길 만한 장치나 설정을 넣으려고 노력하고 있죠. 디자인 영화는 앞으로 더 다양한 디자인 장르에서 더 다양한 형식으로 만들어질 거예요.”

디자인 영화가 많이 제작되고 있긴 하지만, 국내에서 이런 영화를 극장에서 관람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 극장에서 개봉한 <싱글맨>을 제외하고 <헬베티카>나 <오브젝티파이드> 같은 영화는 디브이디를 통해 볼 수 있다. 해당 영화의 누리집이나 유튜브(youtube.com) 등의 사이트를 통해서도 다큐멘터리 일부를 볼 수 있다. 지난해 여름 이례적으로 서울에서 ‘디자인 영화제’가 열렸다. 이 영화제를 통해 <헬베티카> 등을 큰 스크린에서 볼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지난해 열린 디자인 영화제는 일회성 행사로 그칠 전망이다. 그 어느 때보다, 또 그 어느 도시보다 디자인에 대한 열망이 높은 2010년 서울에서 디자인 영화제 같은 행사가 계속된다면 어떨까? 디자인 영화가 널리 알려지고 국내에서도 디자인 관련 영화가 제작된다면, 디자인에 관한 더 풍성한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